문서의 임의 삭제는 제재 대상으로, 문서를 삭제하려면 삭제 토론을 진행해야 합니다. 문서 보기문서 삭제토론 에리히 호네커 (문단 편집) === 말년 === [[동서독 통일|통일]] 후 일단 베를린의 소련 육군 주둔군 기지로 도피했는데, 독일은 호네커의 신병 인도를 요구했으나 소련 정부는 이를 거부, 호네커를 자국으로 망명시켰다. 그러나 불과 2년도 되지 않아 소련이 붕괴된 후, 이듬해 구 공산권에 대해 부정적이던 [[러시아 연방]]의 [[옐친]] 정부의 영향으로 더는 보호받지 못하고 1992년 독일로 송환되었다. 이후 호네커는 1961년 에리히 밀케, 빌리 슈토프와 함께 베를린 장벽 건설에 동의한 혐의, 1974년 서독으로 탈출하려는 동독 시민들에게 화기를 사용하여 저지하라는 명령을 내려 서독으로 탈출하려던 동독 시민 192명을 [[즉결처분]] [[사살]]한 혐의로 재판에 회부되었다. 하지만 이 재판 자체가 국제법적으로 동서독이 서로 다른 나라였던 시절 최고지도자의 [[통치행위]]를 흡수통일 이후 책임을 물어 재판하는 것이라서 큰 논란이 되었다. 게다가 암투병으로 인해 당장 사망해도 이상치 않은 중환자를 심리적으로 옥죄는 가혹한 행위였기에, 호네커의 평판이 최악이었던 당시에도 재판 지속에 반대하는 여론이 우위를 점했다고 한다.[* MDR의 2019년도 다큐멘터리 Honeckers letzte Reise.] 이때 호네커는 1991년에 북한 [[망명]]을 타진하기도 했는데 [[김일성]]은 즉각 무슨 수를 써서라도 호네커를 북한에 데려와 편한 여생을 보내게 하라고 지시했고 모스크바 [[셰레메티예보 국제공항]]에 [[고려항공]] 특별기까지 대기시켰다. 하지만 독일 측에선 만약 호네커가 북한이나 칠레로 망명하면 이를 비우호적 행위로 간주한다고 엄중 경고를 했고, 이미 소련 붕괴가 초읽기에 들어간 러시아 측에서 망한 독재자인 호네커나 위성국 격인 김일성의 체면 따위를 세워줄 이유가 없었다. 결국 호네커의 망명이 [[https://news.naver.com/main/read.naver?mode=LSD&mid=sec&sid1=104&oid=001&aid=0003523201|실패하자]] 김일성은 크게 안타까움을 표했으며 러시아가 독일의 돈에 눈이 멀어서 옛 동지를 팔아넘겼다고 [[https://www.chosun.com/site/data/html_dir/1998/01/23/1998012370175.html|비난했다.]] 호네커를 태우지 못한 고려항공 특별기는 12월 17일, 쓸쓸하게 평양으로 철수했다. 1992년, 서독 안에서도 엄청난 논란이 이어지는 가운데 연방재판소의 허가 속에서 호네커의 재판이 시작되었다. 서독 검찰총장 측은 무려 800쪽에 달하는 기소내용을 제시하였고 호네커는 나치 시절 자신이 투옥되었던 베를린 모아비트 교도소에 수감되었다. 1992년 12월 3일, 법정에 선 호네커는 "나와 내 동지들을 비롯한 범죄적 개인들"이라는 말을 거듭하면서 빈정댔고 재판부에게 "이번 재판이 패자들에 대한 승자들의 정치적 재판이라는 것을 인지하지 못하거나, 이번 재판이 정치적으로 그릇된 동기가 부추긴 역사적 허위진술에 불과하다는 것을 인지하지 못하기 위해서는 장님이거나 아니면 과거에 사건에 대해서 의식적으로 외면해야 가능할 것."이라고 훈계하고는 더 이상의 진술을 거부했다. 구 동구권 지역에서는 반나치 투사였던 호네커를 석방하라는 호네커 지지 시위가 일부 벌어지기도 하였다. 호네커의 변호인은 독일 연방의 기본법에 따라 중병에 시달리는 호네커에 대한 법적으로 보장된 보호를 요청하였다. 서독 여론은 호네커를 동독 정권 범죄의 알파요 오메가로 여겼기 때문에 이러한 변호인의 주장에 대해서 부정적인 반응이었으나 연방 사법부는 변호인의 주장을 검증하기 위해 호네커의 종양과 간의 상태에 대한 검진에 들어갔다. 호네커가 죽어간다는 것은 명백한 사실이었고 재판장 한스게오르크 브로이티감(Hansgeorg Bräutigam)은 아주 유명한 반공주의자로 호네커의 건강 상태와 관계없이 그를 재판에 회부하고 싶어했으나 베를린 헌법고등법원은 1993년 1월 12일, 재판을 중지할 것을 지시하였다. 재판부는 호네커의 건강상 그에게 어떠한 실질적 처벌을 가하는 것 자체가 불가능하다는 것을 인정하고 만약 호네커를 계속 재판하는 것은 동독 정권이 자국 시민들을 탄압한 것과 같은 행위가 된다고 해석하여 독일 법률에 따라서 재판을 폐기하기로 하였다. 재판을 받으며 수감 생활을 하던 1993년, [[암]]으로 인한 [[보석#s-2|병 보석]] 처리된 뒤 반년 후에 딸이 살고 있던 [[칠레]]로 망명하여 회고록을 집필하다가 이듬해 [[5월 29일]] 수도 [[산티아고(칠레)|산티아고]]에서 사망했다. 호네커의 사망에 북한에선 유족에게 "조선의 통일 정책을 적극 지지 성원해 주었는데 말년에 불행하게도 타국에서 서거한 데 대해 애석한 마음을 금할 길 없다."라는 내용의 조전을 보냈다. 사후에 그 회고록은 통일독일의 기성 출판사들이 출간을 거절해서 어느 듣보잡 출판사가 출판하게 되었는데, 한창 통일 후유증이 흉흉했을 때라 구 동독 지역에선 꽤 팔려 출판사 입장에서 대박을 냈다고 한다. 실각 이후 그는 민주사회당([[독일 사회주의통일당]]의 후신)에서 제명되었고, 그와 그의 부인은 1990년에 새로 결성된 [[독일 공산당]]에 입당하여 94년 죽을 때 까지 당원으로 머물렀다.저장 버튼을 클릭하면 당신이 기여한 내용을 CC-BY-NC-SA 2.0 KR으로 배포하고,기여한 문서에 대한 하이퍼링크나 URL을 이용하여 저작자 표시를 하는 것으로 충분하다는 데 동의하는 것입니다.이 동의는 철회할 수 없습니다.캡챠저장미리보기